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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뉴스

은나노의 허상을 벗다


드디어 요란스럽던 은나노의 허상이 벗겨지는 모양이다. '은나노 젖병'의 효력이 광고와 크게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게 자랑하던 항균력은 물론이고, 탈취나 식품의 보존기간 연장 효과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몇 달 전에 은나노 세탁기의 살균기능이 크게 과장된 것이라고 밝혀냈던 소비자보호원의 공식 조사 결과다.


은(銀)이 약간의 살균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은을 몇 가지 감염 치료에 사용하는 향토 요법도 전해오고 있고, 은의 화합물인 살바르산은을 매독 치료제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뛰어난 효력과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합성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운 은을 이용한 치료법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런 은에 대한 관심이 '나노기술(NT)' 덕분에 되살아났던 것이다. 귀금속인 '은'과 첨단기술의 상징인 '나노'가 결합된 '은나노'라는 낯선 단어가 묘한 매력을 발휘했다.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은의 효능은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기업의 입장에서 살균력과 탈취력을 내세운 은나노는 전통과 첨단과 귀족스러운 상징성이 어우러진 최상의 광고 메시지가 돼버렸다.

광고에 등장하는 은나노는 두 종류가 있다.
젖병과 식품저장 용기에 주로 사용되는 은나노는 금속 은을 고운 가루로 만든 것이다. 은이 너무 무르기 때문에 기계적인 방법으로는 그렇게 고운 가루를 만들 수 없어 첨단 화학을 이용해야만 한다. 그런 분말을 '은 콜로이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은나노 분말이 화학적으로 특별한 것은 아니다. 고운 가루가 되어 표면적이 늘면 화학적 반응성이 조금 커질 뿐이다. 그런 은나노에 실제로 살균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젖병이나 식품저장 용기의 경우에는 쓸모가 없다. 제조 과정에서 은나노 입자들이 용기의 재료인 폴리에틸렌이나 폴리스타이렌 속에 파묻혀버리기 때문이다. 은나노 입자를 코팅했다는 세탁기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부 세탁기에서는 은을 전기분해 방법으로 산화시켜서 양전하를 가진 은 이온을 만들어낸다. 옛날에 의약품으로 사용하던 살바르산은이나 질산은도 역시 은 이온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은 이온은 은나노 입자와는 전혀 다른 물질이다. 더욱이 물에 녹아 있는 은 양이온이 충분히 많아지면 수돗물이나 위산에 녹아 있는 염소 음이온과 결합해 물에 잘 녹지 않는 흰색 침전으로 변해버린다.
수돗물에는 많은 양의 염소 이온이 녹아 있기 때문에 애써 만든 은 이온도 쓸모가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은나노 세탁기의 살균력은 처음부터 일반 세탁기와 크게 다를 수 없다는 뜻이다.

은은 화학적으로는 수은.니켈.크롬과 마찬가지로 중금속에 속한다. 다만 인체에 별다른 독성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 특별하다.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바뀌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는 '은중독증'이 유일한 부작용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은나노의 효능에 대한 무분별한 광고를 생각하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새로운 과학원리를 이용한 생활용품 개발은 기업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낯선 과학용어를 무분별한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요즘처럼 광고의 위력이 엄청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자칫하면 그런 광고가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거나 사회적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첨단 과학을 이용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기업이 자신의 발등을 찍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다.